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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Reading&Thinking

오늘의 철학: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by zoost 2023. 12. 4.
효를 실천하는 것은 오직 효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절이라는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14페이지

 

 

공자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인’, ‘친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친절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공자에게 그 그릇은 올바른 의례적 행위인 ‘예’다.

의례가 따분하게 보일 수 있지만 친절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

 

공자의 목표: 인성 개발, 도덕적 역량을 습득하는 것

효도만큼 중요한 역량은 없다.

공자는 변함없는 헌신을 요구하지만, 생각 없는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연로한 부모가 도를 벗어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모를 되돌려놓아야 하지만 그럴 때에는 사려 깊고 공손해야 한다.

 

효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헬스장에 가는 것이 땀을 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위해서인 것처럼,

효를 실천하는 것은 오직 효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절이라는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가족은 우리가 ‘인’을 계발하는 헬스장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라.

 

자기 자신에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국가로, 모든 자각 있는 존재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할 때

친절은 연못에 던진 돌멩이처럼 점점 커다란 원을 만들며 퍼져 나간다.

한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으면 모든 생명에게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인을 구성하는 여러 덕목 중에서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이 부모에게 미치면 효가 되고, 형제에게 미치면 우(友)가 되며,

남의 부모에게 미치면 제가 되고, 나라에 미치면 충이 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자와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맹자 “모든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우물가에 있는 아이를 보면 본능적으로 돕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아이 부모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당신이 인간이며 ‘측은해하는 마음이 인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아이를 도울 것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측은한 마음과 행동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많은 좋은 의도가 그 사이로 떨어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친절할 수 있는 능력은 언어 능력과 같다.

우리의 타고난 친절함은 반드시 밖으로 끌어내져야 한다.

공자는 그 방법을 ‘공부’라고 본다.

<논어> 중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의 ‘공부’는 기계적 암기를 뜻하지 않는다.

심지어 배움 그 자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바로 도덕적 자기 수양이다.

연민에서 나온 행동 하나하나는 곧 삼나무 씨앗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그 나무의 키가 어디까지 자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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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은 우리가 발견하든 발견하지 못하든 늘 그 자리에 있다.

친절은 귀하게 여기면 더욱 늘어난다. 친절에는 전염성이 있다.

도덕적인 행동을 목격하면 신체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 촉발되어 흘러넘친다.

 

사람들은 윤리적 행동을 생각하면 뇌 활성의 동기화 정도가 높게 나타났다.

즉, 이들의 뉴런이 유사하게 동시적인 패턴으로 흥분했다는 의미다.

여기서 영향을 받는 뉴런 집단은 섬엽, 전전두엽피질, 쐐기앞소엽 등에 들어 있다.

쐐기앞소엽은 자기성찰과 조망수용 등과 관련 있고, 인간만이 아니라 원숭이에게도 존재한다.

(<정리하는 뇌> p.411)

 

친절한 행동을 목격한 사람은 더욱 친절하게 행동하게 된다.

친절은 필요에 알맞게 확장된다. 친절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잔인함은 학습되는 것이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길. 오빠와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 토론했다. 나는 타고나기를 정말 착하지도, 정말 악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오빠는 변함없이 성악설이다. 오빠가 한 예를 들었다. “우리 엄마가 심장이 안 좋은데, 심장 이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죽여서 심장 이식을 하면 살 수 있어. 대신 내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도 몰라. 나만 알아. 그럼 죽일 거야?" 공자가 말하는 효도와 착한 본심이 싸워야 하는 질문이다. 그 사람을 죽여서 우리 엄마가 산다고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 남은 몰라도 내가 알잖아. 평생 그 죄책감에 살아갈 수 있을까? 근데 안 죽이면 우리 엄마가 죽는데? 나는 쉽사리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나의 타고난 천성은 무엇일까? 악하게 태어났는데 친절함을 공부하고 수행한 것일까? 착하게 태어났는데 잔인함이 학습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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